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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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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는 1993년 10월 10일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에서 격포항으로 향하던 서해훼리호가 침몰하여 292명이 사망한 대형 해상 사고이다. 사고 당시 정원 221명의 서해훼리호에는 362명이 탑승한 과적 상태였으며, 악천후 속에서 운항이 강행되었다. 과적, 밧줄 감김, 선장의 조작 미숙, 미흡한 안전 관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침몰 원인이 되었으며, 부실한 초기 구조와 미흡한 대처 역시 피해를 키웠다. 사고 이후 정부는 관련자 문책과 제도 개선을 추진했으며, 유가족에 대한 보상과 사회적 파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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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사고 개요
명칭서해 페리호 침몰 사고
원어 명칭 (한국어)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원어 명칭 (한자)西海훼리號沈沒事故
발생일1993년 10월 10일
발생 시간 (KST)10시 10분
위치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위도면 인근 해상
원인기상 악화, 과적
최초 보고군산해양경찰서
피해 상황
탑승 인원362명
사망 및 실종자292명
부상자70명

2. 사고 경위

사고 당시 서해훼리호에는 정원 221명을 초과한 362명(승객 355명, 승무원 7명)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10m/s에서 14m/s의 강풍과 2m에서 3m의 높은 파도로 기상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3]

1993년 10월 10일 오전 9시 40분경, 위도를 출발하여 약 15km 동쪽에 떨어진 격포항으로 향하던 서해훼리호는 임수도 부근에서 10시 10분경 침몰했다. 현장은 혼란에 빠졌고, 초기에는 구조된 인원에 대한 보도가 엇갈렸다.[8][9]

악천후 속에서 정원 초과, 항해사 미탑승, 선장의 난폭한 조작, 부족한 피난 유도원, 구명정 미작동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피해가 커졌다.

1993년 10월 18일, 김영삼 대통령은 교통부 장관 이계익 및 해운항만청장(차관급) 2명을 경질했다.[10]

2. 1. 서해훼리호

1990년 10월 건조된 110톤급 철선인 서해훼리호는 길이 33.9m, 폭 6.2m, 평균 시속 12노트로 전라북도 부안군격포항 사이를 1일 1회 정기 운항했으며, 승무원 14명을 포함하여 221명이 정원이었다.[11]

2. 2. 침몰

1993년 10월 10일 일요일 오전 9시 40분경, 승객 362명과 화물 16톤을 싣고 위도 파장금항을 출발하여 격포항으로 향하던 서해훼리호는, 10시 10분쯤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돌풍을 만나 회항하려 뱃머리를 돌리던 중 파도를 맞아 심하게 흔들리면서 곧바로 전복, 침몰하였다.[12][13][14][15][16]

당시 서해훼리호에는 정원 221명을 초과한 362명(승객 355명, 승무원 7명)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기상 상태는 10m/s에서 14m/s의 강풍과 2m에서 3m의 높은 파도로 매우 좋지 않았다.[3] 9개의 구명정 중 2개만이 작동되었고,[17] 생존자들은 2척의 구명정에 나누어 탄 뒤 부유물에 매달렸다.[18]

침몰 원인 중 하나는 과적이었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1cm 두께의 밧줄이 양쪽 프로펠러 샤프트에 감겨 있었던 것으로, 어업 활동으로 남겨진 이 밧줄이 서해훼리호가 우현으로 기울어지게 만들었을 수 있다.[5]

3. 구조 및 수색

초기에는 사망·실종자를 140명으로 추정했으나 시신 인양이 진행되면서 사망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20] 10월 15일에는 침몰한 선박의 통신실에서 선장, 기관장, 갑판장의 시신이 발견되었고,[21] 11월 2일에는 신고된 마지막 실종자를 끝으로 모두 292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22] 침몰한 선박에서 사망한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잠수부들이 투입되었다.[6]

선체 인양에는 구조함인 구미함[23]의 특수대원, 9,754톤급의 해운항만청 소속 인양선 설악호, 206톤급의 예인선, 52톤급의 양묘선과 이들에 탑승한 200여 명의 승무원이 참여한다고 보도되었고,[24] 10월 17일 선체를 인양하던 도중에 연결한 줄이 끊어져 다시 침몰했다가[25] 10월 27일 다시 인양하였다.[26]

3. 1. 초기 구조

사고 직후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들이 조난 사실을 알리고 40여 명의 생존자를 구조했으며,[19] 사고 발생 1시간여 뒤 강풍과 파도 속에서 어선과 헬기, 군경 함정을 동원한 수색작업이 시작되어[13] 10월 10일 22시까지 70명의 생존자가 구조되고 51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14]

3. 2. 본격적인 수색 및 구조

사고 직후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들이 조난 사실을 알리고 40여 명의 생존자를 구조했고,[19] 사고 발생 1시간여 뒤 강풍과 파도 속에서 어선, 헬기, 군경 함정을 동원한 수색작업이 시작되었다.[13] 10월 10일 22시까지 70명의 생존자가 구조되고 51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14] 침몰한 선박에서 사망한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잠수부들이 투입되었다.[6]

3. 3. 시신 수습 및 인양

사고 직후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들이 조난 사실을 알리고 40여 명의 생존자를 구조했고,[19] 사고 발생 1시간여 뒤 강풍과 파도 속에서 어선과 헬기, 군경 함정을 동원한 수색작업이 시작되었다.[13] 10월 10일 22시까지 70명의 생존자가 구조되고 51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14]

초기에는 사망·실종자를 140명으로 추정했으나 시신 인양이 진행되면서 사망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20] 10월 15일에는 침몰한 선박의 통신실에서 선장, 기관장, 갑판장의 시신이 발견되었고,[21] 11월 2일에는 신고된 마지막 실종자를 끝으로 모두 292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22] 잠수부들은 침몰한 선박에서 사망한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투입되었다.[6]

선체 인양에는 구조함인 구미함[23]의 특수대원, 9,754톤급의 해운항만청 소속 인양선 설악호, 206톤급의 예인선, 52톤급의 양묘선과 이들에 탑승한 200여 명의 승무원이 참여한다고 보도되었고,[24] 10월 17일 선체를 인양하던 도중에 연결한 줄이 끊어져 다시 침몰했다가[25] 10월 27일 다시 인양하였다.[26]

3. 4. 선체 인양

사고 직후 구조함인 구미함[23], 해운항만청 소속 인양선 설악호, 206톤급 예인선, 52톤급 양묘선과 이들에 탑승한 200여 명의 승무원이 선체 인양에 참여한다고 보도되었다.[24] 10월 17일 선체를 인양하던 도중에 연결한 줄이 끊어져 다시 침몰했다가[25] 10월 27일 다시 인양하였다.[26]

4. 원인 분석 및 논란

연호 침몰 사고, 남영호 침몰 사고에 비해 생존자가 많았던 이유는 낚시용 아이스박스와 파카 잠바가 구조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었다.[27] 배가 급회전한 것은 조종 미숙에 의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29]

1993년 10월 10일, 서해훼리호는 위도를 출발하여 격포항으로 향하던 중 임수도 부근에서 침몰했다. 당시 위도 해상은 북서풍 초속 10~14m, 파고 2m~3m의 악천후였다.

4. 1. 무리한 운항

기상 여건이 좋지 않았음에도 무리하게 운항한 점이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악천후였지만 예보 내용을 따른다면 규정상 출항이 가능한 여건이었고, 승무원들은 출항을 꺼렸으나 일부 승객들이 출항을 요구했다는 것이다.[28]

4. 2. 운용 문제

서해훼리호의 운용에는 여러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우선, 승객은 정원을 초과하였고, 승무원은 규정된 인원보다 부족했다.[29] 사고 직전 배가 흔들린 후에 승객들에게 안전하게 선실에 있으라는 안내 방송이 있었고, 그래서 피해가 커졌다는 일부 생존자들의 주장이 있었다. 또한, 선박 회사가 연료를 줄이기 위해 위험한 항로를 운항했다는 현지 주민의 주장도 있었다.[29][30]

사고 당시 서해훼리호에는 정원 221명을 초과한 362명(승객 355명, 승무원 7명)이 탑승하고 있었다.[3] 항해사는 탑승하지 않아 갑판장이 대리 업무를 수행했고, 피난 유도원은 2명뿐이었으며, 배에 설치된 구명 보트 4대 중 1대만 작동했다는 점도 피해를 키운 요인으로 지적되었다.

4. 3. 열악한 운용 환경

보다 근본적인 이유로, 열악한 운용 환경이 지적되었다. 승객에 비해 운항 횟수는 적었고, 선박 회사가 크게 의존하던 국가 보조금도 중단되었다.[31] 업체는 영세했고, 선장이 업자의 눈치를 보는 환경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32]

4. 4. 선박 자체의 문제

선박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배의 구조가 불안정했지만, 1990년에 선박기술업체의 복원력 시험에 통과했었다고 보도하였다.[33]

4. 5. 공식 조사 결과

1993년 12월 1일, 해양 전문가로 구성된 합동조사반은 선박 구조에는 문제가 없고, 정원 초과와 과적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결론 내렸다.[34]

1993년 12월 13일, 사건을 수사한 전주지검은 초과 승선과 과적, 운항 부주의, 방수구 부족 등이 사고의 원인이었다고 발표하였다.[35][36] 당시 서해훼리호에는 정원 221명을 초과한 362명(승객 355명, 승무원 7명)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기상 상태는 10m/s에서 14m/s의 강풍과 2m에서 3m의 파고로 매우 좋지 않았다.[3]

침몰의 또 다른 요인으로, 1cm 두께의 밧줄이 양쪽 프로펠러 샤프트에 감겨 있었던 것이 언급되었다. 어업 활동으로 남겨진 이 밧줄은 서해훼리호를 우현으로 기울어지게 만들었을 수 있다.[5]

5. 사후 처리 및 여파

서해훼리호는 1993년 10월 10일 오전 9시 40분경 위도(蝟島)를 출발하여 격포로 향하던 중 임수도 부근에서 10시 10분경에 침몰했다. 당시 현장은 혼란에 빠졌으며, 초기에는 생존자 수가 68명 또는 90명으로 다르게 보도되기도 했다.[8] 10월 12일 오전 11시까지 확인된 생존자는 67명이었다.[9]

사고 당시 위도는 북서풍이 초속 10~14m로 불고 파도가 2~3m 높이로 이는 악천후였다. 여기에 정원 221명을 초과한 362명을 태운 과적, 항해사 미탑승, 선장의 난폭한 조작, 부족한 피난 유도원, 고장난 구명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피해를 키웠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10월 18일 교통부 장관 李啓謚|이계익한국어 및 해운항만청장(차관급) 2명을 경질했다.[10]

5. 1. 희생자 보상

합의에 따라 사망자 1인당 9910만이 유가족들에게 지급된 것으로 보도되었다.[38] 사망자 보상금은 총 282억이었으나, 서해훼리호의 배상 능력은 10억뿐이었고 해운공제조합에서 73억만 지급되었다. 이에 따라 부족한 금액은 국민성금 93억과 재해의연금으로 충당하였다.[39]

5. 2. 사회적 파장

10월 12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여야 의원들은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를 '후진국형 인재(人災)'라고 주장하였다.[41] 일부 언론에서는 정원을 초과하여 악천후 속에 선박을 운행하는 것을 '준 살인행위', '자살 운항'으로 표현하기도 했다.[40]

대책본부의 운용에 문제가 있었고, 해경의 초기 대응이 늦었다는 점도 논란이 되었다.[42] [43]

당시 여객선 회사가 여객선에 승객을 너무 많이 태워 시체가 무리지어 발견되는 등 인명 피해가 심했기 때문에, 당시 신문죽음의 신이 여객선을 유혹하는 장면의 풍자만화가 실리기도 했다.

5. 3. 정부 대응 및 후속 조치

정부 주도로 희생자들을 돕기 위한 전국적인 모금이 진행되었다.[44] 김영삼 대통령은 10월 18일 교통부 장관 및 해운항만청장(차관급) 2명을 경질했다.[10] 문책 인사로서 교통부 장관과 해운항만청장, 군산지방해항청장이 해임되었고,[45] 교통부와 해운항만청의 관계 공무원 38명, 해운조합이사장이 해임되었다.[46]

참조

[1] 웹사이트 Fears rise for missing in SKorea ferry sinking http://bigstory.ap.o[...] Associated Press 2014-04-17
[2] 웹사이트 Over 280 missing after South Korean ferry capsizes https://web.archive.[...] Reuters 2014-04-16
[3] 웹사이트 "[Progress ferry sinking] 21 years ago, the \"Seohae ferry\" morbid fear" http://news1.kr/arti[...] News1 Korea 2014-04-16
[4] 웹사이트 Namyoungho accident killed 326 people 'worst' ... Seohae ferry 292 people died http://news.donga.co[...] The Dong-a Ilbo 2014-04-17
[5] 간행물 Marine Debris Management Korea Maritime Institute
[6] 웹사이트 A diver's pain: Living with the ghost of Sewol tragedy https://www.aljazeer[...] 2020-02-16
[7] 뉴스 韓国でフェリーが沈没、50人死亡 なお70人以上不明か 読売新聞 1993-10-11
[8] 뉴스 51人死亡、約100人不明 乗客定員オーバーか 韓国フェリー沈没 朝日新聞 1993-10-11
[9] 뉴스 韓国のフェリー事故 65遺体収容、なお100人不明 読売新聞 1993-10-12
[10] 뉴스 フェリー沈没事故で韓国交通相を更迭/金泳三大統領 読売新聞 1993-10-18
[11] 뉴스 90년 건조한 1百10t급 철선 동아일보 1993-10-11
[12] 뉴스 훼리號 침몰 過積·정원초과가 主犯 동아일보 1993-12-02
[13] 뉴스 여객선 침몰 100여명 사망 실종 동아일보 1993-10-11
[14] 뉴스 140여명 死亡·실종 경향신문 1993-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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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뉴스 배가 기울어지면서 10초 정도의 시간에 침몰하였다고 보도되었다. ("구명조끼 걸칠 시간도 없었다", 《경향신문》, 1993.10.11 기사 참고) 경향신문 1993-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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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뉴스 마지막 실종자 발견 경향신문 1993-11-03
[23] 문서 2014년 300명 정도 사망한 [[세월호]]에는 구미함의 후속함이자 한국 최초 국산 잠수함 구난함인 [[청해진함]]이 투입되었다.
[24] 뉴스 4개船團 27척 인양작전 경향신문 1993-10-13
[25] 뉴스 인양船體 다시 침몰 경향신문 1993-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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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뉴스 안전 무시·誤判운항 추정 경향신문 199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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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뉴스 "여객선 구조적 결함 주원인" 윗부분 무거워 평소 작은 파도에도 요동 심해 한겨레 1993-10-12
[34] 뉴스 서해훼리호 事故원인 過積·정원 초과 합동조사반 결론 매일경제 1993-12-02
[35] 뉴스 훼리호사고 수사결과 발표 한겨레 199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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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뉴스 역대 대형사고 보상 얼마나됐나 아현동사고 사망자 2억원 지급 한겨레 199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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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뉴스 뒤죽박죽「대책본부」 동아일보 1993-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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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뉴스 전국 市道郡에 성금접수 창구 경향신문 1993-10-17
[45] 뉴스 "대형사고 반드시 問責" 동아일보 1993-10-19
[46] 뉴스 서해훼리慘事 문책 38명 무더기 징계 동아일보 199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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